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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레마르크의 개선문

내 십대 시절에 가장 영향을 끼친 책은 아마도 레마르크의 《개선문》이다.

이 책을 읽고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이과를 선택했다. 독일 출신 주인공 라빅은 나치가 태동하는 조국을 떠나 프랑스에 불법체류하면서 불법의사로 사는데, 결국 이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스스로 경찰서에 가서 본명과 직업을 대고 수용소로 간다. 그는 프랑스의 적국인 독일 국적자지만 오히려 나치 독일의 적이므로 공연히 추방당하고 싶지 않은데, 전쟁에서 의사는 국적 불문 필요한 존재이므로 이제 프랑스에서도 신분을 숨기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마지막에야 그의 본명이 드러난다.

전쟁이 나도 의사는 군인이 되지 않아도 되는구나, 국적과 상관없이 효용이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젤 똑똑한 줄 아는 십대였지만 이런 멍텅구리가 없다. 그 시대에 여자가 군인으로 징집될 리가 없잖아. 부모님이 너무 귀하게 키운 덕분에 여자라는 자각이 부족했다. 게다가 내가 남자라고 해도, 전쟁에서 의사의 효용이라니 결국 전쟁터에 가게 될 거잖아. 어차피 일 년쯤 뒤에 티비에서 심장수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피가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의사는 안되겠다고 포기하였지만서도. 만약 내가 개선문을 읽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잘 모르겠다.

십대 때 유럽여행을 가서 파리의 개선문을 봤던 거 같은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어쩐지 기억이 나는 건 로마의 트레비 분수다. (아무말대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