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회사를 그만둘 때, 회사에서 전체 직원에게 정해진 날짜까지 거취를 결정하라고 했기 때문에 같은 날짜로 그만둔 사람이 여럿이었는데, 마지막 퇴근하는 길에 경영지원실장에서 전화가 왔다. 우리 부서원들 모두의 회사메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모아서 제출해달라는 것이었다. 업무상 메일의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나?
퇴사자의 메일계정은 보통 바로 삭제되지 않나? 적어도 그때까지 다녀본 다른 회사들은 모두 그러했다. 회사의 계정이라고 해도 개인이 각각 메일을 이용했는데 그 비밀번호를 제출하라는 건 이상하지 않나? 비록 회사계정의 메일이고, 업무상의 메일만 주고받는 용도였다고 하더라도, 각자 개인 아이디를 받아 담당자 아무개로서 실명으로 메일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 개인정보에 의존한 메일을 유지시키고 회사의 다른 사람이 그 계정을 관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대표메일, 편집국메일, 독자투고메일 등과는 다른 경우이다(그런 공용메일계정은 그대로 남겨 인수인계했다).
나는 그런 의견을 밝히고, 퇴사자의 개인 메일계정은 일괄 삭제하는 것이 옳은 방법인 것 같다고 답했다. 게다가 퇴사자에게 과거 소속 부서의 다른 퇴사자의 정보를 받아 모아서 제출하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러자 경영지원실장은 그것도 그런 것 같다며, 메일계정을 삭제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얼마 지나서, 그 회사 다른 부서 팀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메일계정을 삭제하기 위해서 비밀번호 변경이 필요하다, 퇴사자의 메일 비밀번호를 ******로 일괄 변경하겠다는 것이었다. 왜 메일계정을 삭제하기 위해서 비밀번호를 변경해야 하나? 관리자가 비밀번호를 일괄변경하는 게 가능한 시스템이라면, 계정 자체도 일괄삭제하면 될 텐데. 그전에 이야기했던 것과 똑같은 소리다. 왜 계정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 삭제하기 전에 뭘 확인해야 하기에 계정을 열어보겠다는 것일까? 누가 봐도 어이없는 설명이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냐?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하긴 뭐 그 회사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이고, 뭔가 대응하기에도 이미 너무 지쳤기에 맘대로 하라고 두었다. 그러고는, 1년 동안 내 메일계정이 살아 있었다.
사소하지만 불쾌하고 굉장히 쓸데없는 일처리 방식이다. 내 메일계정으로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특별히 악용할 의도도 없었으리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회원제 사이트에서 관련 법에 따라 탈퇴한 회원의 정보도 일정 기간 보관해야할 의무가 있을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퇴사자의 개인정보도 일정 기간 보관해야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통보 방식이나 처리 절차가 괴상하기 짝이 없다.
아무튼 신경을 대충 끄고 살았는데, 엊그제 개인정보보호방침 연구 TFT에서 작성한 문서의 교정 교열을 부탁한다고 해서 들여다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전 회사메일계정에에 접속해보았다. "입력한 사용자 이름 또는 비밀번호가 잘못되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온다. 계정이 삭제된 것인가 비밀번호가 다시 바뀐 것인가? 답은 알 수 없다. 계정을 제대로 삭제한 것이겠거니 할 뿐이다. 직원의 이메일 계정 하나 존중해주지 않는 회사는 그만두는 게 좋다. 그러나 실은 많은 회사들이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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